theQ. 눈물의 크리스마스



센트로 시비꼬 근처에 있는 숙소로 옮겼다
나름 호수 전망방이라 인기가 있는 숙소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욕조에서 느긋하게 몸을 담근건 이번이 처음이다
쌀쌀한 날씨에는 역시 반신욕이 최고다~!



숙소 방에서 바라보는 바깥 경치도 나쁘지 않다
베란다까지 있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이렇게 좋은 곳에 머물면서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았으련만
한바탕 나방이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내일이면 즐거운 크리스마스다
숙소 주인은 바릴로체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선
크리스마스 당일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도 작아 레스토랑이 별로 없을 뿐더라
식료품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식사를 제대로 하려면
레스토랑 예약은 필수라는 정보...

하지만 바릴로체에서는 먹거리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대부분 고기 요리가 메인이다
그도 그럴것이 여긴 소고기가 넘쳐나는 아르헨티나다

마침 바릴로체에 굉장히 유명한 소고기 스테이크 집을 발견했다
예전 대통령 수석 요리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라 여행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알려진 곳
하지만 갑자기 나방이가 스테이크를 먹지 않겠다는 거다
나방이가 먹고 싶은 건 초밥이란다...
의견 충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가 명동 한가운데도 아니고
우리 동네도 아니고
초밥집이 있다면 또 모를까
없는 초밥집을 어떻게 만들어 낸단 말인가...

나방이의 심술에 그 유명한 스테이크집 앞까지 갔다가 예약도 못하고 다시 돌아섰다
초밥 대신 생선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을 찾아 다녔고
어렵게 생선 메뉴가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 할려고 물어봐도
싫다고 계속 심술을 낸다

이러면 안되는데 갑자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 으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참았다...
난 어른이다,,,-_-

하지만 어른 흉내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방이가 스카이프를 붙잡고 엄마와 통화를 하며 엉엉 울어대는 꼴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나방이와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 숙소를 뛰쳐나왔다
나름 가출이다
모두들 즐겁게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난 이렇게 화를 삭힐 준비를 하고 있다
 
" 에이씨! 크리스마스고 뭐고 다 망했다!!! "

라고 생각할때쯤 하늘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 두다다다다다다다다 "


광장에 있던 사람들도 뜬금없는 헬리콥터의 출현에 웅성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한다


앗,,,루돌프 대신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싼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내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갑자기 설레였다


싼타크로스는 이번엔 빨간 소방차에 오르더니 광장을 한 바퀴 휘릭 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소방차 주위로 몰려든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싼타는 선물 보따리를 던져주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꼬마가 소심하게 손을 든다

" 야~여기도 좀 던져봐~! "


무심한 싼타는 꼬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만 선물 보따리를 뿌려댄다
선물이 떨어지자 싼타 할아버지도 소방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렇게 한 바탕 소동이 끝나고 잠깐 동안의 크리스마스 이브의 설레임도 사라지고만다 

숙소에 돌아왔지만 나방이의 심술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
적어도 오늘만큼은 나방이의 심술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솔직히 이제 더이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루트에 대한 고민을 할 때마다
나방이는 입버릇 처럼 말해왔다

" 여긴 굳이 이번에 안가도 돼, 나중에 다시 오면 되지 뭐 "

가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양보했던 곳들...
남미의 머나먼 이 곳이
어린 나방이에겐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곳일진 몰라도
한국에서 모든걸 포기하고 기어나온 나에겐
평생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르기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고 싶은 욕심이 드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평생의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깟 저녁 메뉴 하나 때문에 바보처럼 이러고 있다는게
너무나 우습고
너무나 속상하다

세계일주를 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생각의 깊이가 달라질꺼라 하지만
개뿔 오늘 난 그저 저녁메뉴 하나 때문에 
미치도록 화가 나있고
또 참을 수 없이 초라함을 느낀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로 한다
그냥 나방이는 나방이의 길로
난 나의 길로 서로가 눈치 안보고
나머지 남은 루트를 마치는게 속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방이에게 마지막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여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평생 여자 앞에서 울어 본 적 없는 내가...운다

나방이가...
소고기가...
크리스마스 이브가...

날 울린다...


여자의 눈물이 무기라면
남자의 눈물은 핵폭탄쯤 되는가 보다...

찡찡대던 나방이가 달라졌다
앞으로 고기도 잘 먹겠다고 다짐도 했다

-_-ㅋ


그렇게 눈물로 막을 내릴뻔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은
우리에게 평화로움을 선물한 채 깊어갔다


다음날 드디어 바릴로체의 유명한 스테이크 집에 가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라 사람이 더 꽉찼다

어제도 고기를 먹었는데 오늘도 고기를 먹어도 괜찮겠냐며
나방이에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나방인 자기도 먹고 싶어졌다며
허락을 해줬다;;;




안심스테이크...
아...정말 입에서 살살 녹는 아르헨티나 소고기란...세계 최고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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